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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민원, 일상의 공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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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으로 교단을 뒤흔드는 악성 민원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비단 학교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악성 민원인, 블랙 컨슈머의 갑질과 폭언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야기해 누군가는 오랜 기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음식점이며 병원이 하나둘 문을 닫는다. 급기야 경비원이, 교사가, 공무원이 생을 마감한다.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제도 손질의 움직임이 일지만 이마저도 잠시, 악성 민원은 형태와 장소를 달리해 또 다시 누군가의 일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좀처럼 뿌리 뽑히지 않은 채 사회 전 분야를 흔드는 악성 민원의 실태를 조명하고, 구조적 원인과 해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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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한 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 A씨는 서이초 교사의 일이 남 일 같지 않다. 훌륭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부푼 꿈은 이곳 학교로 발령을 받은 지 얼마 안 돼 벌어진 학교 폭력 사건으로 산산조각났다.

"존중할만해야 존중을 하죠."

말 한마디로

사람 잡는다

양주시 옥정신도시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박진하(36)씨는 2021년 5월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한다. 여느 때처럼 평범했던 그 날은 한 모녀의 등장으로 박씨에게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됐다.

"돈 내놔. 너 과부야?"

악성 민원이 일상을 파괴하고 사회를 좀먹고 있다. 2021년 양주의 한 고깃집이 2023년 의정부의 한 학교가 됐을 뿐 악성 민원과 갑질은 어제도,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 전 분야에서 악성 민원에 따른 피해가 극심해지자 법이 강화되고, 크고 작은 대응책이 잇따르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삶을 파괴하는 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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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은 예사

폭행·성폭력까지…

10명 중 6명

'이직·퇴직 고민'

소상공인 울리는

'별점권력'

악성 민원과 갑질은 더 이상 먼 일이 아니다.

 

나와 가족, 지인에게 일상적 공간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을 정도로 발생 빈도가 잦다. 이는 각 분야에서 실시된 여러 피해 사례 통계에서 확인된다. 폭언·욕설은 기본에 폭행과 성폭력 피해마저 일어난다. 

오늘도 누군가는 악성 민원에 몸과 마음이 멍들고 있다.

교총 설문, 피해 민원만 57.8%

서이초 사건 이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는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2일까지 교사들을 대상으로 악성 민원 피해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1만1천628건 중 아동 관련 피해를 호소하는 각종 악성 민원이 57.8%인 6천720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폭언·욕설이 19.8%(2천304건)로 그 뒤를 이었다. 폭행은 733건, 성폭력도 140건으로 적지 않다.

공무원들이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다. 올해 6월 말 기준 경기도 콜센터에 접수된 민원은 총 34만7천321건인데 이 중 악성 민원으로 볼 수 있는 '특이 민원'은 828건이다. 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449건으로 절반 이상이다. 욕설을 하거나 위협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는 73건, 성적 모독은 3건이었다. 

민원실 하루당 14건꼴

오프라인 공간에서 민원인을 마주하는 도청, 시·군청 민원실로 확대하면 사례는 더 늘어난다. 올해 들어 6월 말까지 도청과 시·군청에 제기된 악성 민원은 1천757건이었다. 휴일을 제외하고 약 124일 민원실이 운영되는 동안 하루에 14건꼴로 악성 민원이 있었다는 의미다. 도청과 시·군청 민원실 1곳당 2~3일에 한 번 꼴로 겪는 일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1천757건 중 폭언이 1천211건으로 70%를 차지했다. 협박은 474건으로 뒤를 이었고 폭행은 10건, 성희롱은 12건이었다. 민원실 내 기물을 파손하는 경우마저 6건 있었다. 위험물을 소지하거나 술에 취한 채 소란을 벌이는 등의 사례도 21건이었다.

악성 민원에 고스란히 노출

공공기관은 물론 경기도소상공인연합회 등 여러 단체에서도 악성 민원의 심각성을 인지, 저마다 이에 대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경기지부가 지난달 22일부터 27일까지 경기도 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상담 예약 없이 민원인을 만났다는 응답자는 75.1%였다. 퇴근 후와 주말에도 민원인으로부터 지속적인 연락을 받았다는 교사 역시 70.7%였다. 시스템적으로 악성 민원 차단이 잘 되지 않고 있다는 게 전교조 경기지부 주장이다.

소상공인들도 이른바 '블랙 컨슈머'의 항의에 노출돼있다. 배달 앱이나 포털 사이트 등에 악의적인 댓글이 달리면 대응에 속수무책이라, 직접 만나거나 전화상으로 이들 블랙 컨슈머에 댓글을 지워줄 것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는 게 소상공인들의 하소연이다. 이 과정에서 환불 요구가 불합리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상을 잠식하는 악성 민원에 일을 그만둘지 고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교조 경기지부 조사에서 응답자 64.2%는 민원 처리로 인한 어려움으로 이직이나 퇴직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전교조 경기지부 측은 "민원 처리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 그로 인한 무기력함으로 이직이나 퇴직을 고민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A씨가 의정부시청 민원실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것은 족히 10년도 더 된 일이다. 시청뿐 아니라 동사무소 곳곳, 나아가 이웃 지역인 양주시청 민원실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경기도 북부청사 민원실에서도 A씨를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다.


시청 민원실을 마치 단골 식당처럼 꾸준히 드나드는 민원인은 A씨 외에도 2~3명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A씨는 가장 피로도가 높은 민원인으로 꼽힌다.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나 길게는 몇 시간씩 머무르는데 장소는 비단 민원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왜 시청의 유명인이 됐나

부서 곳곳을 다니면서 "화분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옮겨라" "신문 가판대 위치를 바꿔달라" 등부터 "불법 건축물 내역을 보고하라" "노점상 단속 대책은 무엇인가" 등 행정사무감사를 방불케 하는 내용까지 요구도 다양하다.

욕설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A씨의 특별함은 '끈질김'에 있다. 민원실에서 요구 사항이 해결되지 않으면 해당 부서를 찾아 일선 주무관부터 담당 과장까지 차례차례 면담하는 것은 예사다. 성에 찰 때까지 민원을 넣고 또 넣는데, 지난해 말에 제기한 민원 사항을 8개월째 반복적으로 내고 있다. 

10년간 '꾸준' 수개월 같은 요구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된 A씨의 심리는 무엇일까. 최근 A씨와 이 문제를 두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한 민원 담당자에 따르면 "민원을 넣는 게 삶의 낙이자 자부심"이라는 게 A씨 설명이다. A씨는 "예전에 민원을 넣었는데 경기도청에서 직접 처리해 문제가 개선됐다. 그 이후로 문제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선 개선이 될 때까지 계속 민원을 제기한다"고 했다.

"민원을 넣어 문제를 열심히 개선해 나중엔 도지사 상 같은 것도 받고 싶다"는 바람마저 내비쳤다. 뚜렷한 목적의식 앞에 업무 방해 등에 대한 고려는 뒷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업무 마비돼도 바뀔 때까지… 

민원제기에 대한 ​일반인 생각은

경인일보가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나흘간 SNS를 통해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원(컴플레인)을 제기한 경험이 있다고 한 응답자 중 동일 사안에 대해 2회 이상 민원을 제기한 경우는 38.6%였다. 세 차례 이상 반복적으로 민원을 넣은 응답자도 11.7%였다.

Q.
불만이 있거나 부당함을 느낄때 민원(컴플레인)을 자주 제기하는 편​이십니까?

Q.
동일 사안 기준, 가장 많게는 어느 정도로 민원(컴플레인)을 제기해보셨습니까?

Q.
동일 사안에 대해 반복적으로 민원(컴플레인)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Q.
민원(컴플레인)을 반복 제기한 후 효과가 더 높았습니까?

'참는 사람이 바보' 인식 팽배

'甲' 되는 순간 열등감 폭발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를 뒤흔드는 악성 민원인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았다.

 

급성장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차츰 쌓여왔던 열등감이 민원인으로서 '갑'이 되는 순간 마구잡이로 분출된다는 것이다.예기치 못한 사고와 재난이 지속되면서 사회적인 불안감과 긴장감이 높아짐에 따라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참는 사람은 바보'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는 경쟁 사회이면서 부·권력·명예 등을 얻을 수 있는 문이 좁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 교육을 받을 때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인격이 형성되는 성장기에 목표를 달성하려면 남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다보니 전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이기지 못하면 피해를 본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그렇다보니 민원을 제기할 때 보다 강하게 하거나 악성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심한 경우도 벌어지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하는 '표현적 주체'가 된 점도 한 몫을 한다. 먼저 표현, 주장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으로 여긴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문화가 약화돼 타인을 무시하거나 차별, 비난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심리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역시 구조적 이유다.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서열화가 생겼다. 그래서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무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경제 발전으로 물질주의가 확산되고 빈부 격차가 커졌다. 이런 가운데 SNS 사회가 되면서 타인과 비교하는 경향이 심화돼 스스로 억울하다고 여기는 심리가 만들어진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방식으로 확산되고 서슴 없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이전엔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젠 '참는 사람이 바보다. 약자가 되면 당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진 점도 영향을 미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악성 민원 제기엔 열등감의 폭발, 피해를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작용한다. 본인이 가진 속상함이나 억울함, 분함을 다른 곳에 가서 푸는 셈이다. 이런 공격성을 약한 사람, 거절하지 못한 사람에게 투사한다. 일부 악성 민원인 중엔 관심을 받기 위해 공격 대상을 물색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경우도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여러 개인적 사안, 사회·정치적 이슈 등으로 사회적 긴장감이 높아진 점이 과다하거나 왜곡해 표출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를 잡아주기 위한 사회적 통제 시스템이 급격하게 완화된 측면이 있는데, 이런 점이 더해져 마치 하나의 문화처럼 인식되고 그렇게 치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렇다 보니 현장에선 아예 대응이 어렵고 교육을 제대로 하기 벅찬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보호장치 역부족

악성민원 피해자

혼자 앓는다

악성 민원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전쟁의 역사 또한 길다. 1997년 처음 제정된 '민원 사무 처리에 관한 법률'은 각종 악성 민원 논란이 도마에 오를 때마다 보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악성민원 계속되는 이유는

'경기 불황이 심화되자 인천지역 백화점에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인 블랙 컨슈머가 급증하고 있다. 억지성 교환·환불 요청은 기본, 쇼핑 도중 부상을 당했다며 위로금을 요구하는 등 천태만상이다.' 

'경기지방경찰청이 경찰관을 대상으로 한 협박과 모욕, 악성 민원 등에 강력 대처키로 했다. 이달 초부터 정당한 법 집행에도 경찰관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당한 사안에 대해 자체적으로 현장 지원 태스크포스 팀과 법률지원팀을 구성, 본격 운영 중이다.'

관련법 '민원인 의무사항' 추가

대표적으로 2016년 법이 전면 개정돼 '민원 처리에 관한 법률'로 정비되면서 이전 법엔 없던 민원인의 의무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민원인은 민원을 처리하는 담당자의 적법한 민원 처리를 위한 요청에 협조해야 하고 행정기관에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다른 민원인에 대한 민원 처리를 지연시키는 등 공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하여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해당 법은 지난해에도 개정돼 악성 민원 관련 법적 대응을 총괄하는 부서를 의무 지정케 하고 민원 처리 담당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블랙 컨슈머를 방지하고 제재하기 위한 제도도 꾸준히 마련돼왔다. 지난 2021년 블랙 컨슈머에 대한 스트레스로 소상공인이 숨진 이른바 '새우튀김 갑질 사건'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된 게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학교 악성 민원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자 여야가 앞다퉈 교권 보호를 위한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제도 보완을 넘어 보호 장치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다수의 민원 전화가 '지금 전화를 받는 직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게 단적인 예다. 악성 민원에 대응하기 위해 통화 내용을 녹음할 수 있고 폭언 등이 있으면 상담을 종료할 수 있는 매뉴얼도 마련됐다.

그러나 이처럼 오랜 전쟁의 역사에도 악성 민원은 쉬이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현장에선 악성 민원 예방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조치는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사후약방문식으로 대응해왔다는 것이다.

신동근 한국노총 공무원노동조합연맹 수석부위원장은 "민원인이 긴장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조치여야 한다. 그런데 전화 녹취만 해도 욕설이나 폭언 사실이 발생하면 그때부터 녹취하도록 지침이 마련돼있다. 이런 식이라면 예방할 수가 없다. 오프라인에선 악성 민원인이 기물을 부수고 폭행까지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 정말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한데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조치에도 실질해법 안돼

대한민국 전반 변화 필요

오랜 전쟁에도 악성 민원이 근절되지 않은 채 여전히 사회를 좀먹는 것과 관련,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변화가 뒤따라야만 근본적 개선이 가능하다고 진단한다. 단기적으로는 악성 민원인에 대한 처벌 강화 및 악성 민원 차단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제도·시스템 보완이 절실하다는 게 각 분야 관계자들 목소리다.

교권 침해를 한 학부모에 대해 고발, 과태료 부과 등 엄중 조치할 수 있도록 교원지위법을 개정해야 한다. 교사가 직접 민원에 시달리지 않도록 민원 창구 단일화 방안 마련해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사회적 긴장이 악성 민원과 같은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더라도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는 경향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과 악성 민원을 넣는 분위기가 잘못됐다는 인식 필요

황의갑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경쟁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피해 의식이 높아진 데서 비롯된 것인 만큼 사회의 독점 구조를 허물고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폭언이 아닌 대화로 협박이 아닌 요청으로 모욕이 아닌 존중으로

당신의 요구가 정당한지

한번 더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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